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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은교 줄거리와 리뷰: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는 것

by 심심은D 2023. 9. 13.

은교 줄거리

은교는 한국 최고의 시인으로 손 꼽히는 이적요 선생님과 그의 수제자 서지우의 일기, 그리고 Q변호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서지우와 이적요 그리고 둘 모두와 알고 지내던 여학생 은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가 서지우를 죽였다.'는 이적요 시인의 일기로 책이 시작되기 때문에 책의 초반부터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극한다.

문장들도 예쁘고 수려해 글을 읽는 즐거움 자체도 꽤 커다랬다. 

 

은교 북커버

 

등장인물들

이적요 - 자기 자신에 사로잡힌 사람

책의 주인공인 이적요는 고루하고 보수적인 한국 문단에 큰 불만과 회의를 가진 한국 현대 문학의 거장 시인이다.
본인이 죽은 뒤에는 생전에 써놓았던 일기를 공개해 문단이 만들어 놓은 자신의 이미지를 깨부수려는 혼자만의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문단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지 언정 스스로 자신의 이미지와 틀을 깰만큼의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이적요의 성향은 여러 군데에서 확인해 볼 수가 있는데, 특히 자신이 죽고 1년이 지난 후에 일기를 공개해달라는 유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본인이 죽기 전에 문단의 고정관념을 깨고 비웃을만큼 자신감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또한 서지우의 이름으로 출간한 B급소설에서 나타나 듯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세계를 꿈꾸고 있지만, 스스로가 욕망을 인정하고 동물적인 사랑을 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적요는 이성으로 은교를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그와 함께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은교를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은교를 '신성'으로 만들고 자신이 그녀를 '순수하게' 사랑한다고 세뇌시키고 나서야만 본인의 감정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은교 - 번뇌하는 영혼들을 이기는 순수함

반면 한은교는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사이의 갈등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사실 심리 자체는 정말 단순했다. 

그저 행동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은교의 순수함과 처녀성을 신성에 비유했던 이적요 시인의 기대와 상상과 달리 은교는 사랑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고 그렇기에 성적 행위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특히 이런 은교의 심리 아닌 심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이적요 선생님이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은 다이어리를 차마 이적요 시인의 측근들도 어찌 하지 못했던 다이어리를 순식간에 불태워버린다. 

그리고 은교는 금방 몰스킨다이어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좋은 건데... 노트만은 아까워요...." 라고. 
이 끝장면에서 두 사람이나 죽음으로 몰고 갔던 일견 '치명적인 사랑'이 정작 은교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었음이 참 순수하게 드러난다.

 

갈망이라는 주제

작가는 소설을 끝마치며 촐라체, 고산자, 은교를 갈망 3부작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리고 그 중 은교는 사람들의 욕망과 그 근원을 파헤친 작품이라고 했다. 

책 속의 인물들이 자신의 욕망과 갈망을 보여주는 모습은 아주 처절해서 가엽기마저 했다. 오래된 스승을 쫒아가고자 발버둥치는 서지우와 사랑을 갈망하는 이적요 시인과 대비되어 적어도 이 세 사람의 관계에서는 아무런 욕망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은교의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자유로워보였다. 

현실세계에서는 있을 법하지 않은 파격적인 소재지만 사람이든, 일이든, 무언가를 너무도 원할수록 오히려 그 무언가를 차지하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은 사람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주제일 것이다. 

 

몰스킨 노트

여담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몰스킨 노트.

은교의 그 마지막 한 마디가 너무 인상 깊어서 책을 읽은 뒤에 몰스킨 노트를 일기장으로 샀다.

아주 특별할 것은 없지만, 부드러운 가죽 커버와 가벼운 속지가 꽤 마음에 든다.

바보같지만, 값이 좀 나간다는 것도 왠지 몰스킨을 더 사고 싶게 만드는 요소다.

그 뒤로도 일기장을 다 쓸 때마다 나는 교보문고에 가서 새 몰스킨 노트를 산다. 이번엔 무슨 색을 사볼까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