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있는 동물원
대학생 때 서울 시청 알바를 통해서 서울대공원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맡았던 일은 코끼리 사육장이 있는 실내 전시장 청소. 손님 한 명 오지 않았던 한 겨울에 하루 종일 좁은 사육장에 갇혀있던 코끼리는 몸을 팔자로 돌리는, 정형행동을 보이곤 했다.
그때 그 경험이 너무 충격으로 남아있어서, 그 뒤로도 동물원이라는 말만 들어도 씁쓸한 생각이 들곤 했었다. 그리고 10년도 더 지나서 청주 동물원으로 옮겨간 사자 바람이와 그 곳의 수의사 김정호 선생님, 그리고 그 분의 책 제목이 코끼리 없는 동물원인 걸 알고는 바로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코끼리 없는 동물원 줄거리
이 책은 수의사 김정호 선생님이 청주 동물원에 근무하면서 진료하고 만났던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름을 지었던 아기 호랑이의 생애, 방사 훈련을 하게 된 독수리, 죽은 동물들을 기리는 청주 동물원의 추모석 공간까지 청주 동물원에 와서 지내고 떠난 동물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청주 동물원이 동물들의 복지를 위해 마련한 시설들이 이모저모 설명되어 있기도 한데, 그 때문에 책을 다 읽고 나면 직접 한 번 동물원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직업인으로서 동물원 수의사
이 책을 읽으면서 글을 쓴 김정호 수의사가 참 균형이 잘 잡힌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여러 번, 작가는 동물원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청주 동물원은 실제로 갈 곳이 없어진 아프고 약한 동물들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동물원의 기능 중 '전시'도 여전히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이다. 작가는 자신의 직업이 가진 이 아이러니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 동물원의 존폐에 대한 의견은 다르겠지만, 누군가가 해야 된다면 내가 맡아 이곳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소명 의식을 가진 사람인 게 책에서도 보여졌다.
오히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동물원의 일들이 견디기 힘들 것 같은데, 그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자신이 바꿀 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내는 게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나에게 그리고 나 외의 많은 사람들에게 청주 동물원도 김정호 수의사도 어느 날 불쌍한 갈비뼈 사자를 구해준 사람과 기관이지만, 그들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그런 일들을 맡아왔었고, 그렇기 때문에 바람이도 데려갈 수 있었다는 걸 이 책을 보면서 알았다. (문외한인지라, 불쌍한 동물 한 마리 구해주는 건 어느 동물원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동물을 옮기는 것도 비용을 책임지는 것도 기존의 다른 동물들과의 적응까지 다 그냥 되는 일이 아닌 것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계속 타협하지 않는 자세랄까.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직업의식같은 걸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책 속의 문장들
긴장하면 지고 설레면 이긴다고 했던가.
작년부터 딸 다민이의 소원으로 다시 개를 키우기 시작했다. (...)딸아이의 노트에는 둥이가 하얀 솜사탕같고 목소리는 디즈니의 에리얼 공주와 닮았다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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