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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리뷰 (3) 국가별 유대인 수송 정책

by 심심은D 2023. 9. 18.

 

Area under german control

사진은 1942년 독일의 영토이다.

즉, 영국, 스웨덴, 스위스 등의 아주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나치정책 - 유대인 수송과 학살 정책에 동참해야 했다.

 

그렇지만 국가별 유대인 해결책에 대한 반응과 전개 방식은 매우 상이했다.

 

책에서는 서유럽, 발칸 지역, 중부 유럽으로 나누어서 각 국가별 유대인 정책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지역들을 소개한다.

 

불가니아와 루마니아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는 국경을 마주한, 아주 가까운 국가다. 그러나 유대인 정책에 대한 이 두 국가의 반응은 너무 달랐다.

Map Romania and bulgaria

불가리아

유대인을 구별, 추방, 학살하는 정책은 불가리아의 왕과 의회는 물론 국민의 큰 반대에 부딪혔다.

 

독일의 외압에 못이겨 불가리아 정부는 유대인을 수도 외곽으로 추방하려 했지만, 소피아의 주민들이 왕궁 앞에서 반대 시위를 벌여 이 또한 무산되었다.

 

거센 반대에 독일에서 불가리아로 파견된 나치 관리들은 결국 불가리아에서 유대인 이송을 포기했고, 나치의 집권과 세계2차 대전 기간 중에 불가리아에서 학살당한 유대인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의 의무에 따라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첫째, 가슴에 붙이는 장식은 '너무나 작은 별'일 따름이었다. 둘째, 대부분의 유대인은 그것을 그냥 달지 않았다. 그리고 셋째, 그것을 단 사람들은 "그것을 오인하는 군중들로부터 아주 많은 동정심을 받아 그들은 실제로 자신이 단 별에 자부심을 느꼈다."

 

독일인들은 처음에 불가리아의 유대인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보리스 왕의 책임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독일 정보원들이 그를 암살한 것은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군주의 죽음도, 1943년 초에 있었던 단네커의 도착도 상황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했다. 의회와 민중이 분명히 유대인을 편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피아의 최고 랍비는 공개적으로 "신이 유대인의 운명을 결정했고, 인간이 유대인을 고문하고 처형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선언했다.

 

붉은 군대의 진주와 더불어 반유대 법안들이 폐기될 떄까지 이송이 되거나 자연사가 아닌 죽음을 당한 불가리아 유대인은 한 명도 없었다.

 

+) 위의 내용은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불가리아에서도 유대인 이송/차별이 0이었던 것은 아니고, 불가리아 내부적으로는 당시 유대인 차별과 이주에 대해 자성적 &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

 

루마니아

루마니아는 유대인을 추방하고 학살하는 데 독일보다도 더 열심이었던 국가다. 루마니아는 독일이 학살을 시작하기 이전에 유대인을 먼저 학살하기 시작했다.

 

1941년 8월까지 루마니아인들은 독일의 도움 없이 30만에 가까운 유대인을 죽였다.

불가리아와는 정반대의 의미로 독일은 루마니아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독일인 관료들은 루마니아 정부에 잔인하고 비조직적으로 유대인을 학살하는 일을 중지해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루마니아 스타일이란 5000명을 열차 화물칸에 발디딜 틈 없이 태우고는 여러 날 동안 목적지도 계획도 없이 교외를 계속 달리게 하여 질식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유대인에게서 국적을 최초로 박탈했고, 또 나치가 아직도 첫 실험을 하느라 분주했을 때 대량학살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또한 부끄러움 없이 자행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의 차이는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유대인 정책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Map Italy & Greece

이탈리아

이탈리아는 당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으로 유럽 내에서 유일하게 독일이 인정하고, 독일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국가였다. 하지만 유대인 문제에 대해서는 이탈리아 정부는 독일과 다른 노선을 취한다.

 

이탈리아는 독일의 외압으로 1930년대 후반에 반유대적 법률을 도입한다.

독일에서는 참전용사, 고급 훈장을 받은 유대인 등 국가에 이바지한 유대인들은 이 법률의 적용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무솔리니는 이를 확대 적용시켜 거의 파시스트당원의 사돈의 팔촌까지 법안 대상자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에, 사실상 이 법률로 수용되거나 추방되는 유대인은 거의 전무했다.

 

이후 이탈리아 파시즘 정부는 전쟁 발발 전에 외국계 및 무국적 유대인 제거를 시도한다. 하지만 이 시도도 직접 유대인 학살을 이행해야 하는 공무원들의 반발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탈리아의 이런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긴 독일이 1943년 직접 유대인 수용책에 관여하게 되면서 이탈리아 유대인들의 일부는 오스트리아의 국경과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수용소로 보내졌다.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이탈리아 유대인 7500명 중 6900명이 죽었지만 그래도 이는 이탈리아 모든 유태인의 10 퍼센트에 훨씬 못 미치는 숫자였다.

 

그리스

그리스인들은 유대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했고 유대인 문제는 공론화되지 않았다. 그리스 일부 당원들은 유대인 학살에 찬성했다.

 

그리스는 세계대전이 끝난 이 후에도 유대인 문제 관련 전범들을 처벌하는 데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 지역에서 유대인 문제를 담당했던 막스 메르텐 박사는 그리스에서 체포되었지만 곧 석방되어 독일로 돌아갔다.

 

그리스에서는 매일 2000명에서 2500명의 유대인이 기차에 실려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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